내가 언제부터 저것에게 집착하게 된 건진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저것에게 화가 났다는 거지. 말없이 사라지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쯤 되면 나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왜 짜증을 내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처음은 그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겁도 없이 기어 들어와서 내 손에 스러져갈, 그런 하찮은 존재였을 뿐이다. 목덜미에 칼을 겨누었었고, 끝났어야 했을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 녀석을 살려주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겠지.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자신의 소지품도 거의 그대로 두고 나간 걸 봐서는, 도망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내 손에 죽는다는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겠지. 약간 붕 떠있는 머리칼을 짜증스레 매만졌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언젠가는 그 녀석이 너무 거슬려서, 홧김에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아버린 그 눈에 차오르던 절망과 공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바닥에 꼴사납게 뒹굴고 있는 것에는 체념마저 보였다. 괜히 실소가 났다. 아, 그래.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후로 그 녀석은 나에게서 벗어나겠다는 헛된 희망을 버렸으니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용해먹겠다는 목적 외에 누군가를 필요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좀 달랐다. 이유 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건 지금 그 녀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서로를 이유 없이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바깥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꼭 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설치는 것들. 괜한 짜증감에 카이세리움을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이명처럼,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주군."
"뭐?"
"아니, 계속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님’자를 붙이자니 그것도 좀 어색하고……."
"……."
"어때?"
이상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마냥 선명하다. 이런 때에 회상이나 하는 꼴이라니. 내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다.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이 말이 계속 뇌리를 스친다.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살려달라는 말을 비웃으며 더 처참히 부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 녀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내 옆에 있으면 될 뿐, 그 외엔 관심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깥과의 연결고리에 대해 별다른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봐서, 상당히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것 같았다. 거기서 난 내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닮은, 말도 안 되는 사이.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차차 나도 그 녀석도 인정하고 있었다.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려고 기를 쓰던 것들이 나뒹굴고 있다. 재미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손에 맺혀있던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은 별로 더 싸우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돌아서려는데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핏자국이 저들이 온 쪽으로도 조금씩 이어져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맞서기 전에도 옷자락 군데군데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홀린 듯 빨간 자국을 따라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단순히 나에게 오기 전에 또 누군가와 한바탕 하고 온 걸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아까부터 통 보이지 않는 녀석 때문일 것이다.
띄엄띄엄 묻어있던 핏자국이 갈수록 길게 선을 긋고 있다. 그리고 그건 갑작스럽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
"……."
"뭐하냐."
"……자, 자고 있었어."
무릎을 굽혔다. 딱 봐도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가 방금 깨어난 거다. 안에서 무언가가 확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거칠게 어깨를 붙잡았다. 덜컥 겁부터 집어먹는 모습이 짜증스럽다.
"왜 이랬지? 내가 분명 이러지 말라고 했을텐데!!"
"…어쩔 수 없잖아! 그 녀석들 엄청 강해보였는데……."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단지 내가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무작정 다른 이들을 막아서다가 죽을 뻔한 적. 쓸데없는 오지랖이었고 그때 내가 참지 않았다면 이 녀석은 영영 일어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죽지 않을 만큼 패면서 내가 했던 말들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내가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화가 난다. 말없이 어디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어긴 것에 대해서도.
"내가 그런 놈들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
"정말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나는 녀석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녀석이 저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해서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 죽인 녀석들을 좀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워졌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차갑게 식어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는 시체의 팔을 한 번 밟았다. 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 질퍽한 소리가 고요한 성채를 울렸다.
"저기……."
침묵이 깨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 녀석에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주군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뜸을 들이며 녀석은 품속에서 흰 꽃을 하나 꺼내들었다. 녀석의 행동에 말문을 잃은 것은 나였다. 나에게 수줍게 내밀어지는 꽃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녀석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와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엘나스에서 구할 수 있는 꽃인데, 정말 예뻐서. 꼭 주군한테 주고 싶었어… 일이 좀 커져버렸지만."
상처투성이인 녀석의 몸과는 다르게 꽃은 멀쩡했다. 오히려 탐스럽게 활짝 벌어진 잎들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제 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 입 밖으로 튀어나온 헛웃음에 녀석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재미있다는 기분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재미있기보다는 우스웠다. 자신의 앞에서 간이고 쓸개도 다 빼줄 것 같은 계집애같이 구는 그를 볼 때마다 우스움과 포만감이 들었다. 피식피식 웃으며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움직임에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향한 것은 꽃이 아닌, 그것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목이었다. 으스러질 듯 강하게 움켜쥐자 녀석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꽃을 놓쳤다. 흰 꽃잎 몇 장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바닥에 떨어진 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놓자 녀석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붉게 자국이 난 손목을 감싸 쥐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네. 내가 고맙다고 하면서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끈질기게 내 옆에 붙어있었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지 생각을 못해?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주,주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까짓 꽃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제 몸을 버려가면서 지켜냈는지. 그리고 내가 녀석에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하는지. 녀석이 자신에게서 받아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과 같이 자잘한 폭력과 폭언뿐인데도. 녀석은 끈질겼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애정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눈물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던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러면서도 올곧은, 자신을 향한 시선에 허리를 살짝 기울여 시선을 마주했다.
"이거 참, 아깝게됬네. 이렇게 고생해서 구한 꽃이,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거여서 말이야."
느긋하게 발을 들어서, 꽃을 살짝 뭉갰다.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차분하게 돌아오는 녀석의 얼굴에 왠지 모를 짜증이 몰려들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주군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오도록 노력할게."
흥이 깨져서 나는 녀석에게 몸을 돌렸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들과, 짓밟혀 형편없이 망가진 꽃과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무심코 내린 시선에, 신발에 붙어있는 꽃잎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본래는 티 하나 없이 순백의 색이었던 꽃잎은 단단한 내 신에 짓밟혀 살짝 더러워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은 꽃잎이었다. 하지만 용케도 그 모습을 유지하며 신발에 붙어 있었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왕좌에 느긋하게 앉아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홀로 남은 녀석이 떠올랐다. 꽃잎을 거친 입술에 가져다 대자, 부드러움에 나도 모르게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를 드러내어 꽃잎을 물었다.
"칼베리안……."
내가 아무리 너를 때려도, 너에게 험한 말을 해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지. 너도 가엽군. 내가 네게 흥미를 가지기 전에 일찍 포기하고 떠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으니. 얼마나 남았을까. 네가 나를 떠나는 그 때, 너를 씹어 삼켜버리는 날이.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날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즐거워져,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