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렌즈스토리'를 전부 플레이 해야 이해가 가능한 전개가 다소 있습니다.
체육선생 매그너스 × 칼베리안
꿈결과 추억 사이
* * 1 * *
빵빵- 날카롭고 요란한 경적소리에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소년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볼썽사나웠다. 어정쩡한 걸음걸이가 딱 보아도 큰 사고가 날 것 같아, 한숨을 쉬며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주황빛 가로등 불빛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모습이 한 마리의 길고양이를 연상시키게 되어, 목을 가다듬고 소년을 불렀다.
“거기-”
용케 자신을 부르는 지 눈치 챈 모양인지, 소년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일순 뚝 멈췄다. 몇 걸음을 걸어 가로등 불빛에 자신을 드러내자, 소년의 보라색 눈동자가 커졌다. 푸른색 모자를 푹 눌러쓴 녀석의 머리색과 똑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눈 색이 독특하다고 생각할 무렵, 황급히 뒤돌아 후다닥 달려가는 소년의 행동에 멍하게 서 있었다.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균형을 붙잡으며 뛰어가는 녀석이 대로를 향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녀석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고, 녀석이 차도로 막 발을 내딛는 순간 한 쪽 손목을 붙잡아 거세게 잡아당겼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뼈대밖에 없는 손목에 당황해했지만,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괴물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년에 손의 힘을 풀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 차에 치여 죽고 싶어?”
“…….”
“너, 집이 어디냐? 데려다줄게. 네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집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지, 집…?”
소년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치한이라도 된 기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손의 힘을 조금 푸는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소년의 발버둥이 멈췄다. 이제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뒷머리를 긁으며 변명하듯이 말을 건넸다.
“네가 그렇게 발버둥을 치니까,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잖냐. 집은 어디냐니까?”
“…….”
“빨리 말해. 데려다줄게.”
자신을 올려다보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년의 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애써 그 떨림을 억누르려는 것 같았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한 떨림이었다. 어디 다친 건가? 놀라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더니,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보라색 눈은 눈물이 잔뜩 고여 일렁거리고 있었다. 야….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긴 자신의 음성에 소년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년은 그렇게 한참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 * 2 * *
“음,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위험한 곳에 갇혀 있다가 탈출을 했다고? 돌아갈 곳도 없고?”
자신의 정리의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위에 발을 올려 몸을 더 웅크렸다. 말없이 펑펑 우는 소년의 울음이 가까스로 멈추자, 겨우 달래서 집까지 데려와 소년의 손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들려주었다. 우유를 반 컵정도 마시고 나서야 소년은 입을 열었다. 만난 지 2시간이 넘어서야 소년의 이름이 칼베리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덤으로 믿기 힘든 소년의 이야기까지. 하지만 소년의 손목에 남아 있는 짙은 멍자국이라던가, 비정상적으로 메마른 몸은 소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고 그녀 어두운 곳이었다고 되풀이하는 소년에 의심을 완전히 거두기는 힘들었으나 굳이 아픈 곳을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뭐, 어쩌면 큰 충격으로 부분 기억상실이라고 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갈 곳이 없다 이 말이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은 난감한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자,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소년의 어깨는 좀 더 움츠러들었다. 더 작아질 곳도 없어 보이는데. 혀를 쯧, 하고 차자 그것에 놀란 건지 어깨를 들썩거리는 소년의 모습에 이번에는 소년 몰래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뭐, 간단하네. 우리 집에서 지내면 되겠다.”
“알겠....네?”
“간단하잖아. 험한 일을 당했고, 그런데 갈 곳이 없는 소년이 나처럼 선량한 사람에게 구해진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거든.”
벙찐 소년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만만하게 웃어주자, 소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천천히 번져나갔다.
“이름이 칼베리안이라고?”
“네, 네. 맞아요. 칼베리안.”
“좋은 이름이네. 아까도 들었지만 난 매그너스라고 한다. 잘 부탁해.”
“…매그너스.”
이상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녀석에 가슴 한 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착각이라고 치부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지? 시간도 늦었으니 간단하게 파스타라도 먹을래?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녀석, 칼베리안의 모습을 흘깃 보며, 토마토를 꺼내들었다.
* * 3 * *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이름만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랑 사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소년은 자신과 다르게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작은 실수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마 전에 안 좋은 곳에 있어서 더 그런 거 아닐까. 그렇게 넘겨짚는 것이 속이 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자신이 그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녀석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까. 책상 앞에 앉아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생물선생이 당직 차트를 들고 서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데, 오늘 당직이라네.”
“허, 벌써?”
“그래. 그럼 수고하게나.”
아카이럼이 내민 당직 차트를 훑어보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귀찮게시리. 의미 없이 차트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집에 혼자 있는데.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집 번호를 꾹꾹 누르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혼자 사는 집이라 내 집에 전화를 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제야 내가 한 남자아이와 함께 살고 있구나를 자각할 수 있었다. 수화음은 길게 가지 않았고, 조용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아, 나야. 별일 없지?”
“네.”
“별건 아니고. 오늘 당직에 걸려서 말이야. 늦게 들어갈 것 같아. 혼자 밥 챙겨 먹을 수 있겠어?”
“아, 알겠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썩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별 수가 없기에 그래, 그럼 이따 보자. 하는 말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계를 흘긋 보니 아직 2시 반이었다. 퇴근까지는 한참이었다. 수업시간이라 학생들이 들락거리지 않는 교무실은 조용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믹스 커피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단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오늘따라 지겹도록 시간이 지나가지 않아서, 하마터면 자습을 하는 학생들에게 지금 당장 가방 챙겨서 집에나 가! 하고 소리 지를 뻔한 것이 몇 번이었다. 하지만 함께 당직을 맡은 사람이 하필이면 스탄 선생이라 그럴 수도 없고 초조하게 시계만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자습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끝나기 5분 전부터 챙겨 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기가 무섭게,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챙겨들고 교무실을 뛰쳐나갔다. 설마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요리를 하려다가 손을 베였다던가, 누가 찾아왔다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뛰다시피 걷다가, 제 꼴이 마치 애 하나 키우는 사람 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왔다.”
문을 열고 자신의 귀가를 알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었을 때는 신발을 벗고 캄캄한 집 안을 더듬거리며 걸어가 불을 켜곤 했는데, 이제는 먼저 불이 켜져 있었다. 싸늘한 냉기는 느끼기 힘들어졌고, 대신 어색한 미소나마 지으며 자신을 맞이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별 일 없었지?”
“네.”
“밥은?”
“그냥, 냉장고에 있던 피자 데워먹었어요.”
“그래, 잘했어. 뭐하고 있었어?”
“TV보면서….”
칼베리안은 머쓱하게 웃으며 벽걸이 TV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옷장에 넣고, 욕실로 들어가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녀석을 보니, 무릎을 모은 채로 조용히 TV를 보고 있었다. 무슨 프로인가 하고 봤더니 오래된 외국 영화였다. 저런 것이 취향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가서, 가방을 정리했다. 책상에 앉아 물끄러미 책장을 보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이 별로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체육 교사가 읽을 법한 책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소리를 낮춘 영화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녀석이 오래된 외국 영화를 좋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동안 할 것이 없어 마지못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라는 직업 상 아침 일찍 출근하고, 때로는 오늘처럼 당직도 하고. 8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녀석은 혼자 밥을 먹고 지루한 시간을 조용히 보낼 것이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칼베리안은 두 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앉아있는 소파로 걸어가 옆에 앉았다. 자신의 행동에 녀석은 깜짝 놀란 것 같았으나, 곧 고개를 푹 숙여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애초에 내가 왜 심호흡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너, 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 없냐?”
“…?”
“생각해 봐. 계속 이 상태라면 너 혼자 심심할 거 아니야. 그렇다고 내 집에 뭐 네가 읽을 책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른 가지고 놀만한 것도 없고.”
“…….”
“네가 싫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너 혼자 집에 있는 것도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녀석의 침묵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원래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니었지만 한참의 시간이 걸려서야 녀석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요?”
“엉? 뭐가?”
“그, 학교를 다니는 거요.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어요?”
순진하고도, 어떻게 보면 뻔한 물음에 웃음이 터져 나와, 손을 들어 녀석의 보라색 머리를 헤집었다.
“네 옆에 있는 사람 직업이 뭔지 벌써 잊어버린 거야? 신수 국제 고등학교 교사야. 네가 오케이만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널 데려가서 입학시킬 수 있어.”
“저, 정말이요?”
“그래.”
녀석의 얼굴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제야 제 또래의 아이들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런데, 너 나를 부를 때 저기요, 라고만 부르더라.”
“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날 텐데….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흠, 그럼 그냥 편하게 선생님이라고 불러. 어차피 내일부터 학교도 다닐텐데, 뭐.”
“잠깐, 내일이요?”
“엉. 그러니까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녀석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 밤새 춥지 않게 거실에 보일러를 넣은 것을 확인한 다음 방으로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데리고 온 지 처음으로 녀석이 밝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워낙에 소심하게 보이는 녀석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지 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워낙 학생들이 착하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같이 있을 테니까.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웠다.
교복점에서 새로 맞춘 빳빳한 새 교복을 녀석은 영 어색해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 책가방을 매고, 교복을 입은 녀석은 제법 학생처럼 보였다. 딱 또래 나이대에 어울리는 모습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좋아. 아까 스탄 선생님께 말씀 들었지? 넌 2학년 2반이다. 그럼 수업시간에 보자고.”
칼베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2반 교실 문 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녀석은 고개를 뒤로 돌려 잠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 앞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다시 문이 조심스럽게 닫히는 모습을 보고서야 교무실로 돌아와 수업준비를 할 수 있었다.
* * 4 * *
칼베리안이 학교에 다니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는 칼베리안도 이제 집에 함께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먹으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재잘대면서 말하기 시작했고, 자신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간간이 받아주는 것이 점차 일상이 되었다. 칼베리안의 담임도 칼베리안이 처음 왔을 때보다 말도 훨씬 더 많이 하고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다며 칭찬했고, 그 말을 들었을 때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저녁에 칼베리안을 데리고 고깃집에 갔었다. 나도 참, 주책이군. 책상 앞에 붙인 시간표를 확인하며, 출석부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학년 2반, 그러니까 칼베리안 반의 수업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나가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구령대 앞으로 달려왔다. 그중에는 칼베리안도 껴 있었고, 제법 아이들과 잘 뒤섞이는 것 같아 희미한 웃음을 짓다, 아이들을 보고 재빨리 감췄다.
“일단 운동장 2바퀴부터 돌자.”
“아아~”
“시끄러워! 다 몸 푸는 거니까 빨리 돌아!”
아이들이 줄을 맞춰 운동장을 돌 동안 운동장 한 구석에 있는 체육창고로 가서 허들을 꺼냈다. 허들 5개를 차례로 세워놓자, 어느새 운동장을 다 돌고 온 건지 아이들이 헉헉거리면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거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숨을 가다듬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허들달리기다. 어떻게 하는 지는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따로 설명은 하지 않으마. 번호 순서대로 할 거고. 끝난 사람은 자유 시간이다.”
“와아!”
자유시간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러댔고, 평소라면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라도 터트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달리기가 끝난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여전히 헉헉거리며, 간간이 가슴을 툭툭 두들기는 녀석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3주 좀 가까이 녀석과 지내면서 알게 된 점들 중 하나는, 녀석은 체력이 굉장히 약하다는 것이다. 또래 남학생들과 달리 녀석은 쉬는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물론 꼭 그것 때문은 아닐 테고, 아마 전에 좋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여학생들도 쉽게 소화하는 체육시간을 힘겹게 진행했다. 점점 녀석의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녀석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집에서라면 그러지 말라고 이마를 툭 건드려주겠지만, 보는 눈도 많을뿐더러 공식적으로 녀석과 나의 관계는 학생과 체육선생님에 불과했다. 애써 허들을 가볍게 뛰어넘는 아이들로 시선을 돌리며, 점수를 불러주는 것에 집중했다. 드디어 마지막, 칼베리안의 차례였다. 몇 번의 체육 수업으로 인해 칼베리안의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친절한 아이들은 칼베리안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기운을 주는 것 같았다. 시작하라는 짧은 호루라기 소리에 칼베리안은 숨을 크게 몰아쉬다가 허들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의 허들을 뛰어 넘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두 번째 허들을 넘기 위해 뛰어 오르는 모습이 휘청거리더니 이내 허들과 함께 앞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출석부를 던지듯 내려놓고 녀석에게 달려갔다. 아으으, 짧게 신음하는 녀석은 내 손이 닿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넘어지면서 모래바닥을 쓸게 된 손바닥은 물론,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디, 어디 다른 곳은 괜찮아? 뼈는 안 아프고?”
다급한 내 물음에 녀석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어나 봐.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말해보자,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던 녀석이 다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다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잽싸게 녀석을 단단히 붙들고는 한숨을 쉬었다. 내 한숨소리를 들은 녀석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의 모습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아 녀석을 안아들었다. 놀란 녀석에 미약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뒤돌아 등 뒤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놀고 있어라. 어차피 칼베리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데려다주고 오마.”
아이들은 고개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칼베리안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유시간이라는 말에 구령대 밑에 있는 축구공을 향해 달려가는 남학생들을 보며 단순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며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선, 선생님. 양호실은 저쪽인데….”
“알아.”
“그런데 왜….”
“그 정신 나간 여자에게 치료를 맡기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하는 게 낫다.”
“하지만….”
“너, 날 못 믿는 거야? 체육선생도 보건 쪽도 다 공부한다고. 잔말 말고 조용히 있어.”
수업시간 중인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녀석을 의자에 앉히고, 서랍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아무래도 체육시간에 사고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고. 양호선생도 자리를 비울 때가 있으니까. 이런 것들을 상비해 두곤 해. 다리 좀 걷어봐.”
칼베리안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걷었다.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심하게 까져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차근차근 소독부터 시작하고 약을 발랐다. 마지막으로 밴드를 붙이려다 고개를 살짝 든 순간, 칼베리안의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 때문일까. 녀석의 눈을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도.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녀석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마저 밴드를 붙였다. 긴장 때문인지 살짝 거칠어진 녀석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녀석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자신에게서 그 사람을 보는 건지. 기분이 나쁘기도 했고, 왜 기분이 나쁜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복잡한 마음에 탁 소리 나게 구급상자를 닫았다.
“됐어. 너 혼자 돌아갈래? 아니면 같이 갈까?”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 아요.”
“그래. 먼저 돌아가. 난 정리 좀 하고 돌아가마.”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살짝 절뚝거리며 교무실을 나서는 녀석을 지켜보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녀석은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서 보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 부모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빛이라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내가 녀석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나. 생각해보면, 칼베리안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가끔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물어보면 그냥, 보다가 알았다고 대답하곤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 정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거다. 그에 비해 나는. 정말 뭐하는 거냐, 매그너스.
그 날 이후로 녀석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녀석을 피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녀석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녀석의 접시에 조금씩 남겨져 있던 피망을 보고 마트에 가서 피망을 지나친다던가. 녀석이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퇴근길에 떡볶이를 사온다던가, 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고, 칼베리안은 제법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많이 뒤처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다고 말하며, 밤늦게까지 책을 붙들고 있는 모습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시험이 끝나고, 시험을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러 진수성찬을 차리자 칼베리안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시험이 끝난 해방감 때문인지, 아니면 식탁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만찬 때문인지는 몰라도 식사 내내 칼베리안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보기 좋네.”
“네?”
“보기 좋다고. 그렇게 웃고 좀 다녀라. 어깨도 펴고. 사내자식이 만날 어깨나 움츠리고 다니니까 그렇게 비실비실한 거 아니냐.”
“제, 제가 언제요!”
“네 친구들에게 물어봐라.”
“아니에요!”
이제 제법 큰소리도 낼 줄 아는 녀석이 정말 보기가 좋았다. 아니, 그냥 단순히 보기가 좋은 것이 아니라.
“…예쁘다.”
“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자신은 물론 칼베리안 역시 파스타를 감아올리던 포크질을 멈추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정적이 깔렸고,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허둥대다가,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이제는, 온전한 나를 보고 있는 눈을.
“예쁘다고, 너.”
자신의 말에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 녀석은 짧은 탄식소리를 내며 포크를 떨어트렸다. 접시 위에 떨어진 포크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녀석은 머뭇거리고 있었고, 나는 최대한 빨리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야 했다. 젠장, 이럴 때 내가 국어교사였으면 말을 좀 더 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웃기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나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후, 나도 잘 모르겠다.”
내 말에 녀석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보라색 눈이 전등 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듣고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 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좋아한다.”
너와 함께 밥을 먹고 내일을 이야기 하는 일상이 좋았다. 집에 돌아올 때 누군가가 불을 켜 놓고 온기로 가득 채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온전히 나를 보는 네가 좋았다. 엉망진창인 고백에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거였다. 녀석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물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티슈를 뽑아 녀석에게 내밀자, 녀석은 떨리는 손으로 티슈를 받아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조용한 말에 녀석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티슈로 눈물을 꾹 찍어낸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정말 예쁘다.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나 역시 웃어주었다.
* * 5 * *
“뭐하냐? 또 책 봐?”
“또는 무슨 또. 누가 들으면 내가 책벌레인줄 알겠네.”
“맞잖아, 이 도서관 죽돌이. 그럴 시간에 나 같으면 밖에서 공이라도 한 번 더 차겠다, 이 약골아.”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오늘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에 장난을 걸자 툭툭 받아쳐주는 녀석이 귀여워 머리를 헤집어주었다. 이제 녀석은 더 이상 나에게 거리감을 가지지 않는다. 때로는 이렇게 반말도 섞는 모습을 보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존댓말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 모습도 나름 귀여워서 봐줄만 하다.
“밥은? 먹었어?”
“한참 전에 먹었죠, 뭐. 밥솥에 밥 있어요. 그거 먹으면 되요.”
“허, 예전에는 밥도 데워주더니, 사랑이 식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드세요.”
여전히 책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녀석에 툴툴거리며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충 밥상을 차려서 수저를 들자, 등 뒤에서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 무슨. 밥상이 이게 뭐에요. 홀아비같이.”
“…뭐? 너, 많이 컸다? 애인에게 그런 말도 하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계란 후라이라도 해줄게요.”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내는 녀석의 모습에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무슨, 잔소리 많은 마누라 하나 둔 기분이야.”
“표현이 그게 뭐에요.”
“넌 나에게 홀아비라고 했잖아!”
“전 맞는 말을 했고, 매그너스는 틀린 말을 했죠!”
뭐어! 너 이리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녀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계란을 내려놓고 내 방으로 도망쳤다. 한걸음에 녀석을 따라잡아서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쓰러트렸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아, 항복! 항복!”
소리 내어 웃는 녀석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녀석은 정말 작았다.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그럴 때마다 사내자식이 그게 뭐냐고 혀를 차긴 했지만, 핀잔 아닌 핀잔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칼베리안은 웃으면서 자신의 품속을 더 파고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예쁘장한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녀석은 간지럽다는 듯이 까르르 웃었고, 그 웃음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해서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칼베리안은 더 이상 없다.
“만날 책만 읽지 말고 운동 좀 열심히 해봐. 어디 가서 체육선생 애인이라고 말도 못하겠네.”
“어차피 숨기고 다니는 걸.”
“그거뿐만이 아니야. 체력 비실비실해서, 나중에 밤에 잘 견딜 수 있겠어?”
약간 진담이 섞인 농담에 칼베리안은 벙찐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어, 왜 그래? 설마 상상한 거야? 한 번 더 직격타를 날려주자 칼베리안은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낄낄 웃으면서 옆구리를 간질이자 온 몸을 비틀다가 결국 항복을 외치며 이불을 들추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알겠어, 내가 농담한 거야. 몇 번이고 달래주자 겨우 토라진 얼굴을 풀며, 순순히 품에 안겨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이불을 바로 해주며, 부드러운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좋은 꿈꾸길.
* * 6 * *
“…뭐해?”
평소와 달리 집에 불이 꺼져있었다. 친구들과 놀러나간 건가, 하고 거실 불을 켰는데, 소파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아, 왔어요?”
“응. 근데, 뭐하고 있었어?”
“그냥, 뭐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녁은요?”
“아직 안 먹었지. 너는 먹었지?”
“아니, 아직이요. 같이 먹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의 모습이 이상했다.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빠르게 냉장고를 열어 찬거리를 꺼내는 행동이 완강해서, 일단은 화장실로 들어가 가벼운 샤워라고 하고 나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
평소와는 다르게, 수저 소리만 들리는 식사였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녀석은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은 것은 나였다.
“그냥 말해. 속 썩이지 말고.”
나의 말에 녀석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긴 침묵이 흘렀고, 녀석은 그사이에 심호흡을 몇 번이고 했다. 조용히 녀석을 바라보며, 녀석이 입을 열기를 끈질기게 기다려주었다.
“…죄송,해요.”
모기만한 목소리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모든 의미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갭이 컸다.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보라색 눈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싫어지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에요.”
“알아.”
“…….”
“뭐, 아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워낙 갑자기 만나게 되었으니까. 우연에 가까울 정도로. 아니, 우연이지.”
“…….”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나까지 시큰해져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즐거웠어. 같이 있어서.”
그리고, 사랑한다. 마지막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녀석은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모습에 머리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손이 올라가지가 않았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껐다. 집 안이 암흑에 먹힌 듯이 깜깜해졌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7 * *
따르릉- 따르릉-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젠장. 아침은 항상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잠을 잘못 잔건지, 뻐근한 어깨에 기지개를 피며 거실로 나왔는데, 전날 먹다 남긴 음식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오늘 마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충 치우기 위해 다가갔다가, 걸음을 멈췄다.
“…?”
두 개의 밥그릇과 두 개의 수저가 마주보고 있었다. 뭐지? 당황스러움에 식탁을 빤히 내려다보다 시계를 보고 황급히 정리했다. 어제 누가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고 주스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여는 순간, 다시 한 번 당혹감을 느꼈다. 마시지도 않는 탄산음료가 냉장고 한 구석을 보란 듯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일단 출근이 급했기에 오렌지 주스를 한 컵 따라 마시고 집을 나섰다.
이상한 일은 퇴근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빌리지도 않은 학교 도서관 책이 소파 위에 놓여 있다던가. 냉장고 서랍을 열어보니 지나치게 많은 고기라던가. 귀신이라도 씌었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큰일까지는 아니라서, 그냥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책이야 가져다 놓으면 되고, 고기는 내가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찜찜하긴 하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야!”
계주달리기를 하다가 한 학생이 발을 헛디뎌 운동장을 굴렀다. 황급히 달려가서 살펴보니 무릎이 심하게 까져 있었다.
“어떡하죠? 오늘 힐라 선생님 연수 가셨다고 했는데.”
다친 녀석의 친한 친구가 울상이 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자 괜찮다고 달래주며, 여전히 쓰러져 있는 녀석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놀고 있어라. 어차피 얘가 마지막이었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데려다주고 오마.”
말을 하고 몸을 돌리는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 상황,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기계적으로 교무실로 발을 옮겼다. 수업시간 중이라서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친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서랍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내어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 준 다음, 밴드를 찾아 상자를 뒤적거렸다.
“…….”
분명히 새로 사 놓았던 밴드곽이 열려 있었다. 열어서 확인해보니 딱 하나가 비어 있었다. 누가 나 몰래 썼나? 하지만 그럴 일이 없는데. 녀석의 무릎에 밴드를 천천히 붙여주면서, 먼저 가보라고 한 다음 구급상자를 천천히 닫았다.
“놀고 있어라. 어차피 …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데려다주고 오마.”
“됐어. 너 혼자 돌아갈래? 아니면 같이 갈까?”
“…저,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 아요.”
“그래. 먼저 돌아가. 난 정리 좀 하고 돌아가마.”
“이런 말을 듣고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 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좋아한다.”
아.
보라색 눈동자.
구멍 나 있던 기억들이 천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맞아, 칼베리안. 녀석의 이름이었지. 비실거려서 허들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해서 크게 다치고 말이야. 집에 책을 가져다 둔 사람도 녀석이고. 고기를 좋아해서 냉장고 서랍에 채워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고, 탄산음료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하면서 마트에 갈 때마다 꼬박꼬박 장바구니에 넣는 것도 녀석이었다.
창문을 열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지내고 있지? 처음 봤을 때처럼, 그렇게 되면 내가 쫓아갈 거야, 칼베리안. 뭐, 난 당연히 잘 지내고 있다. 네가 보고 싶은 거만 빼면 말이지. 그것만 빼면, 정말 괜찮다. 그것만 빼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녀석의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 * 뒷 이야기 * *
성은 어둠에 먹혀 있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달빛마저도 어둠과 피냄새, 시체 썩는 냄새에 목이 졸려 사라지고 있었다. 소리마저도 어둠에 먹히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저곳 부서진 파편을 밟는 작고 규칙적인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이 졸려가던 달빛이 발자국 소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점점 커졌고, 고요한 공간 안에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성 안에 빛이 들어온 것이 얼마만인지. 창문을 타고 스며드는 빛에 그제야 안을 똑바로 볼 수가 있었다. 원래 바닥 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피에 젖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시체 냄새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목구멍 안에서부터 토기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애써 내려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녀석이, 돌아왔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던 것과 같이, 조용히 돌아왔다. 녀석은 엉망이 된 주변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로, 언제 자신이 사라졌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신발이 채 마르지 않은 피에 젖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까이 온 녀석에게서는 낯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딘가 맡아본 적이 있는 익숙함이 돌지만, 낯선 누군가의 냄새가. 마치 바람의 냄새 같았다. 항상 불지만 매번 다른 바람을, 녀석은 온 몸에 한가득 묻히고 돌아왔다. 낯설어 폐부를 찌르면서도, 익숙하여 올라오는 토기를 진정시켜주는 녀석의 향을 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Commission >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그칼베] 날탱이님 커미션 - 이유 (0) | 2019.04.06 |
---|---|
[매그칼베] 날탱이님 커미션 - 완벽의 존재 (0) | 2016.07.24 |
[매그칼베] 날탱이님 커미션 - 꿈의 언어 (0) | 2016.06.14 |
[매그칼베] N츠힛 / 날탱이님 커미션 - 폭군의 소년 (0) | 201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