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비바람이 거센 밤이었다. 큰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지만, 이미 안에 입은 옷은 축축하게 젖은 지 오래다. 질척한 진흙이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고, 젖은 나무뿌리는 내딛는 걸음을 미끄러지게 만들었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둠에 잠긴 숲은 코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거의 짐승적인 육감을 이용해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오두막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아마 현재 숲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일 것이다. 그제야 푹 눌러쓴 후드를 벗고, 집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통해 내부를 살폈다. 시선을 주자마자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나무로 된 낡은 문이 바람에 덜컹거리고, 이따금 천둥번개가 몰아쳤지만, 보라색 머리를 헐렁하게 대충 묶은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입가가 올라갔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찾아온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쾅쾅
문을 두들겼지만 안은 조용했다.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뒤섞여 잘못 들은 거라고 착각하기라도 한 것일까.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어 다시 손을 들어, 아까보다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거센 비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 청각을 세워 문 안의 소리에 집중하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낮은 발자국소리가 다가왔고 문이 살짝 열렸다. 비좁은 문틈으로 경계심 가득한 보랏빛 눈을 볼 수 있었다.
“…누구시죠?”
이런 날씨,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소리 내어 웃을 뻔했지만, 애써 꾹꾹 누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검을 잡지 않은지 오래된 손은 따뜻하고, 내 손과는 달리 부드러웠고 말랑거리기까지 했다. 손안의 온기와는 다르게 서늘한 공기가 온 몸을 스쳐 지나갔다. 가을이 오고 있다. 녀석이 열심히 심은 꽃들이 하나둘 색을 잃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마 이번 주 내로 비가 오면, 저것들은 다 볼품없는 모양새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하얀 눈이 썩다 남은 꽃들의 잔해를 덮어주고. 그 눈이 녹는 봄이 오면 녀석은 다시 정원에 꽃을 심을 것이다. 꽁꽁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리지만, 옷에 진흙이 묻는 것도 모르고, 이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꽃씨를 하나하나 꾹꾹 묻겠지. 그럼 머지않아 꽃들은 다시 피어난다. 그 꽃들 중 몇 개는 녀석의 손에 골라져 방에 있는 화병에 꽂힐 것이다. 너와 내가 지내는 방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은한 꽃냄새가 퍼질 것이다. 멀다고 하면 먼, 1년 후의 이야기지만 생각만으로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졌다.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미래는 물론이며, 나 혼자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나의 성에 있으며 가끔 찾아오는, 제 목숨이 아까운지 모르는 녀석들을 죽이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니까. 그런 단조로운 일상에서 미래를 꿈꾼다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녀석을 만나고 나서야 하게 된 생각이다. 그 당시의 나는 그 일상이 무의미하다고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주군?”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녀석의 얼굴은 아마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이젠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왜?”
“…?”
이어지는 물음에 시선을 돌려보니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혀 붉어지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여기에서까지, 내 생각을 하는 이유가 뭐야?”
“너 지금 무슨…”
“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해?”
“….”
“매그너스에게 나는 뭐야?”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들으며, 무언가 끊어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뻗어진 손은 녀석의 멱살을 단숨에 잡아챘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 붙였다. 쿵. 녀석의 몸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이 부딪히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려졌다. 녀석의 발끝이 땅에 닫지 않고 있음에도 녀석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손은, 내 손을 붙잡을 생각 따윈 전혀 없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래…. 그랬지. 이게 현실일 리가 없지.”
녀석을 노려보던 눈에서 힘이 풀리고,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늘 현실이라고 믿는다. 녀석의 웃음을, 온기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녀석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눈을 뜬 그 순간. 밝은 햇살부터가 거짓인 것을. 내 손은 더 이상 녀석의 옷깃이 아닌 목을 잡고 있다. 손바닥 아래에서 맥박은 고동치지 않는다. 그러니, 힘을 준다. 너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날 바라볼 뿐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질문에 답을 원하는 얼굴로.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거짓에게 대답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손아귀의 힘은 적어도 녀석의 목뼈만한 나뭇가지를 당장에라도 부러트릴 힘이지만, 녀석의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깨어날 수 있는 것일까. 손을 펼쳐 녀석을 놓는다.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숙여진 얼굴에 더 이상 시선이 꽂히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의 끝을 향해 걸었다. 굳게 닫힌 거대한 문을 밀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언제 가을이 온 건지. 쌀쌀한 바람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낙엽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비라도 온 건가. 멍하게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다 발을 뗐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발은 충실하게 정원을 향하고 있다. 아마 이 날씨라면 꽃들은 이미 다 지고 없을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꽃대나 겨우 있을까.
정원에 도착한 발이 멈췄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꽃의 잔해조차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손길이 닿지 않은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땅에는 잡초조차 없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거야?”
그러게.
“매그너스도 알고 있잖아. 이건 다 거짓이라는 거.”
알고 있지.
“그런데.”
난 무얼 바라고 있을까.
“무엇을 바라고 있어?”
너는 더 이상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그럼으로 나는 네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너는 이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지 않는다. 네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며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낙엽만큼이나 메말라있다. 네가 심은 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네가 피워낸 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내 앞으로 온 너는 나를 올려다본다. 대답해줘, 매그너스. 너에게 있어서 나는 뭐야?
너는 꿈이다. 현실이 아닌 여기에서조차 달콤해지지 않는 악몽. 아주 잠깐의 달콤함으로 계속해서 꿈을 꾸게 만든다. 헤어나갈 수 없는 미로.
악몽을 꾼 적이 있다. 네가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꿈이었다. 꿈속의 성채는 미로와 같았고,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그곳을 헤매며 너를 찾아다녔다. 잠에서 깨어난 내 옆자리는 차가웠다. 성채에 너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도 깨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 너는 나를 떠났었다. 그 때 내 시간은 멈춰있었다. 시간이 멈춰 있었기에 내 성은 무덤이 되었고, 나는 성의 주인이 아닌 묘지기가 되었다. 묘지기가 된 내 앞에 너는 유령처럼 나타나서 입을 뻐금거린다.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야? 너는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어? 그런 네 모습이,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시체들과 겹쳐 보였다.
그래봤자 꿈은 꿈이다. 꿈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도 될 수 없다. 하지만 온전히 거짓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너는 온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너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나의 모습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너는 사실일까, 거짓일까.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나는 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꿈이 계속되는 일이 없어지지 않을까.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떠졌다. 고요한 아침 바람이 살랑거린다. 또 다시 아침이다. 다시 꿈에서 깨어났고,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시선을 옆에 두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몸을 완전히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왔다. 성을 돌아다녔지만 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 이전 꿈에서 널 마지막으로 보았던 정원으로 나갔다. 성 밖을 나오니 추위가 오기 전, 여름의 끝자락에서 제 색을 화려하게 보이는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지는 화단 앞에 웅크리고 있는 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척을 느낀 넌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꿈에서와 달리, 꿈에서처럼 네 눈은 온화하다.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너는 나를 마주한다. 그런 너에게, 손을 뻗는다. 너는 가만히 내 손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내게 안긴 너에게서 희미하게 꽃냄새가 난다.
삶의 대부분을 검과 함께 보낸 나의 언어는 협소하고 서툴기 그지없다. 어린 아이의 것과 별다를 바 없을 언어로 너에게 진심을 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 이런 내 말에, 나는 조용히 화답한다. 작은 팔을 올려, 나를 마주 안는다. 괜찮아.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 속삭여지는 말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