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성혁님은 '매그너스' 오마쥬, '메이플스토리2'의 '바르칸트' 연기를 담당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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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커플링이 아닌, 가능한 누구를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은 대본으로 짜여 있습니다. '빈 대사'를 마음대로 상상하며 즐겨주세요.)
침묵이 꼭 죽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내가 마주한 침묵이 그런 것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침묵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떠졌다. 고요한 아침 바람이 살랑거린다. 침묵이 이런 것이라면. 고요함이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물론 그 생각은 네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고, 가능한 것이었다. 그새 일어나 텅 비어있는 옆자리가 조금은 불만스러웠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믿지 못해 의심하고, 두려움에 떨며 서로에게 상처만 주던 날들은 이제 지나갔다.
천장의 조잡한 무늬들을 멍하게 올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갑옷을 걸치지 않은 몸은 가벼웠다. 거의 평생을 갑옷을 입고 지냈지만, 갑옷을 걸치지 않으면 편해 보인다는 녀석의 말에 가끔은 갑옷을 벗어보곤 한다. 주기적으로 성에 침입해오는 적들을 생각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동이라 할 수 있지만. 나나 녀석이나 내가 그런 조무래기들에게 쉽게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러하고. 물론 나는 갑옷을 입고 있는게 훨씬 더 편했지만 굳이 녀석에게 말하지 않았다. 금방 시무룩해져서 말꼬리를 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
“ .”
밖으로 나가자 한가로이 복도의 창틀에 턱을 괴고 기대 있는 녀석이 몸을 돌렸다. 아침의 시원한 바람을 가득 묻힌 채로 녀석에 나에게 안겨왔다. 내가 갑옷을 종종 벗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거다. 두껍고 딱딱한 갑옷을 벗어야만 녀석과 좀 더 가깝게 할 수 있다. 녀석의 체온이나, 체취나. 아니면 지금처럼 가득 묻힌 바람 냄새나.
“요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그래.”
“ .”
“아침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진다고? 별일일세.”
녀석과 같이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녀석이 일어나는 시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날 일찍 자든 늦게 자든, 녀석은 나보다 항상 일찍 일어나 성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처럼 성의 복도를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여기저기 뒤적거리고 있다던가. 정말인지 신기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녀석의 머리를 헤집었다.
“넌 잠도 없냐. 아니면 아침이 좋은 거야?”
“ ?”
“둘 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하긴, 처음부터 녀석은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녀석을 살려둔 내 행동도 그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녀석으로 인해서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고 있다. 너무 길게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침묵을 지키는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의아함을 담은 눈빛에, 녀석이 입이 미처 벌어지기 전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아? 밥 먹어야지.”
나의 물음에 잠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나 나나 밥을 잘 먹은 편은 아니었지만, 얼마 전부터 녀석의 식사에 신경 쓰게 되었다. 밥이라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안 그래도 비실거리는 녀석이 정말 한 순간에 골로 갈까봐. 내 주장에 녀석은 내가 같지 먹지 않는다면 자신도 먹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녀석의 고집에 두 손을 든 것은 나였다. 천하의 매그너스가 녀석의 단식투쟁 따위에 굴복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상대가 녀석이라면 다르다. 거대한 식당으로 들어서니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접시 두 개가 식탁 위해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우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녀석은 오늘 아침도 다이노르의 안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퍽이나 실망한 눈치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저 잘게 썬 고기를 입 안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맛은 어때?”
“ .”
“당연히 맛있어야지.”
식사를 한다는 건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대검을 들고 홀로 성에 앉아 있노라면 딱히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의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식욕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 그것이 내 삶의 목표이자 내가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물거리면서 고기를 씹는 녀석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란 녀석은 정말 뭘 먹고 자랐기에…”
“ ?”
“먹는 모습까지 귀여울까.”
“ !!”
입 안에 넣고 씹던 고기를 막 삼키려던 녀석은 내 말에 크게 반응하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입을 막아 고기가 튀어나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켁켁거리다 물컵에 손을 뻗은 녀석은 컵을 단숨에 비우더니, 겨우 진정된 끝에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왜. 불만이라도 있어?”
“… .”
“너보고 귀엽다고 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아마 네 주변에 진실을 말하는 놈들이 없었나보지.”
“ …”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난 사실만 말한다고.”
너에 한에서만. 내 말에 귓불까지 빨갛게 된 녀석은 결국 말하기를 그만 두고 접시에 코를 박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식기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이 넓은 공간에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접시에는 절반도 더 되는 고기가 남아 있었다. 못마땅한 내 시선을 눈치 챈 녀석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 남긴다, 또.”
“ .”
“아침에 고기가 잘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는 늘 고기를 안 먹어.”
“ ?”
“당연히 문제지. 고기를 안 먹으니까 네가 그렇게 비실비실한 거야. 툭 건드리기만 해도 어디 한 군데는 제대로 나갈 것 같다고. 전에 무기는 대체 어떻게 들고 다녔는지 정말 궁금하다니까.”
“ !”
“물론, 아주 잘 봤지. 겨우 한 번 검을 맞부딪혔는데 바로 놓치는 보습을 말이야.”
“ ….”
할 말을 잃고 그저 주먹만 꼭 쥐는 녀석을 보다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넌 너무 먹는 양이 적어. 스펙터가 너보다 더 많이 먹을 거다.”
“ …”
“말이 안 되긴. 방금도 말했잖아. 난 사실만 말해.”
어쨌거나 한 번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한 이상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먹을 녀석이다. 오히려 억지로 먹였다가 탈이 나서 고생하는 것은 녀석과 자신 둘 다이기에, 더 이상 뭐라 하는 것을 포기하고 앞에 놓인 접시를 밀어냈다. 녀석이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한 이상 나도 더 이상 먹을 마음이 없었다.
“오늘은 뭐할 거야?”
“… .”
“또 산책? 늘 같은 풍경인데 뭐가 그렇게 색다르다고 돌아다니는지 원.”
“ ?”
“안 나가긴, 나가야지.”
녀석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정말인지 가끔 녀석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산책 같은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 더더욱.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럴지는 몰라도. 그래도 녀석의 손을 잡고 익숙하다 못해 이젠 신물이 날 정도인 성채의 정원을 걷는 것은 참을만했다. 괜찮았다.
“손.”
내 말에 녀석은 별 다른 말없이 손을 마주 잡았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작은 손. 그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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